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57

1998년 현대 우승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공격적 투자·감독 용병술·선수층 탄탄 물샐 틈 없는 전력으로 감격적 첫 패권 1998시즌의 화두는 ‘일각수 천마의 비상’이었다.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 현대 유니콘스로 옷을 바꿔 입고 ‘현대답게’ 공격적인 투자로 공을 들인 약발이 제대로 들었던 한 해가 되었다. 현대는 ‘폐가’인 해태에서 박재홍이란 보물을 입도선매로 확보한데다, 쌍방울에서 박경완과 조규제란 대들보를 거액의 현금으로 사들여서 번듯하게 궁궐 같은 새집을 짓고 축하연을 펼친 양상이었다. 첫 시행된 용병 농사도 대박난데다, 방출되어 굴러온 돌인 이명수까지 손에 넣어 물샐 틈 없는 전력을 구축하였다. 현대는 역대 최단기간, 최소경기 만에 81승을 챙기며 1위를 확정 짓는 쾌거를 이루며 독주로 싱겁게 페넌트레이스를 끝내버렸다. 투타의 완벽한 조화를.. 2011. 8. 2.
1997 외환위기와 해태의 쇠락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1997년은 연말에 터진 ‘IMF 외환위기’와 맥을 같이 한 지각 변동이 프로야구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한보·기아·쌍방울 등의 부도 여파가 해태에게도 미쳐 위험하다는 설이 프로야구계에 파다하게 퍼져있는 가운데 해태 타이거즈는 선수를 팔아 연명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쌍방울이 주포 박경완을 현대에 현금 9억 원에 내다 판 것과 해태가 팀의 간판 스타이자 팀의 정신을 상징하고 팀에 108승을 안겨준 조계현을 삼성에 현금 4억 원에 내다 판 것은 모기업이 그만큼 재정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는 징후였다. 그리고 해태가 1997시즌 종료 후 선동열에 이어 이종범까지 일본 주니치에 저항 없이 내준 것도 그 이면에는 현금 확보에 목적이 있었고, 그 후에도 1998시즌 종료 후 ‘샛별’ 임창용에.. 2011. 7. 28.
1997년 꿈같은 'V9'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모기업 재정난 속 신예들로 '호랑이 털갈이' '비운의 영건' 김상진 마지막 역투로 LG 꺾어 1997시즌 해태 타이거즈의 화두는 ‘호랑이 털갈이’였다. 모기업의 재정난 속에서도 주전이 아닌 신예들로만 해외전지훈련을 실시하며 ‘물갈이’를 꾀했다. 임창용·김종국·김상진·장성호·이호준·김창희·박진철·오철민 등이 대만과 하와이 캠프를 통해 한 단계 레벨 업 되는 효과를 보았다. 앞선 시즌 종료 후 LG 트윈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최향남·송유석·동봉철을 내주고 최훈재·조현을 영입하며 타선을 보강하기도 했다. 해태는 선동열과 김정수의 공백을 메울 새로운 마무리로 ‘핵잠수함’ 임창용을, 타력에서는 이순철의 공백을 메울 공격의 첨병으로 루키 김창희, 김성한의 공백에는 최훈재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거기에 완숙미를 더해.. 2011. 7. 25.
박재홍 파동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1차 지명 해태와 계약 파기하고 현대 입단 “돈 때문이다” 비난 속 ‘호타준족’ 맹활약 1996시즌 약체로 평가받던 해태 타이거즈 우승의 원동력이 ‘팀워크’였다면, 그 끈끈한 팀워크의 ‘본드’ 역할을 해준 이가 박재홍이었다. 광주일고 출신인 박재홍은 4년 전 고졸우선지명권을 통해 이미 해태로부터 1차 지명을 받았지만 연세대 졸업 당시 실업팀인 현대에 입단하며 파란을 예고했다. 이는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하기로 하는 전제였고, 그로 인한 계약파동이 한파가 되어 무등산을 꽁꽁 얼리고 말았다. 박재홍의 이 쿠데타적 파동은 타이거즈 1세대 즉, V7의 주역들이 역사 속으로 스러진 자리에 이종범과 더불어 박재홍·김종국·이호성·홍현우 등으로 차세대 막강 타선을 구축하려던 계획에 막대한 차질을 .. 2011. 7. 25.
V8 달성한 1996시즌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동열·성한 없었지만 똘똘뭉친 ‘타이거즈 정신’ 페넌트레이스 1위 오르고 ‘전인미답’ V8 위업 1996시즌 해태 타이거즈는 특별한 전력 보강 없이 선동열의 일본 진출, 김성한의 은퇴, 이종범과 이대진의 방위복무 등의 공백으로 인해 하위권으로 분류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광주일고 출신 슈퍼스타 박재홍이 해태 입단을 거부하면서 선수단 사기도 저하된 상태였다. 그런데다 서재응은 메이저리거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김상훈은 대학 진학으로 입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박재홍과 맞트레이드 된 최상덕의 이적과 김종국·김상진·장성호 등이 루키가 되어 리그에 참여했지만 전력에 큰 보탬이 되지못했다. 오로지 기댈 언덕은 위기에 처하면 하나로 뭉치는 ‘타이거즈 정신’ 뿐이었다. 해태는 잔인한 4월(5승9패)과 간신히 탈꼴.. 2011. 7. 18.
선동열의 주니치행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무등산 폭격기’ 11시즌 동안 146승 달성 김성한 등 해태 V7 주역 역사 뒤안길로 1995년 해태 타이거즈는 V7의 주역들이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 뒤 소수정예주의의 한계라는 틈새로 밀려든 거친 변혁의 물결에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암울한 시즌을 보냈다. 해태는 시즌 내내 3위 자리에 단 한 차례도 오르지 못한 채 64승4무58패(0.524)의 성적을 거두며 4위로 마쳤고, 4위까지 참가자격이 주어지는 준플레이오프제도마저도 폐지되어 가을잔치에 초대를 받지 못하는 불운까지 겹쳤다. 방어율(3.06), 세이브(40), 탈삼진(872) 등 팀투수부문 성적은 단연 1위였으나, 타율(0.242)과 홈런(75) 등 팀타격부문 성적은 꼴찌에서 두 번째일 정도로 투타의 불균형이 극심했다. 해태의 투고타저.. 2011. 7. 16.
김인식 감독과 OB 베어스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내우외환’ OB 김인식감독 믿음의 야구 실현 전년도 7위·항명파동 잠재우고 우승 ‘파란’ 1995시즌 원년 챔피언 OB 베어스의 13년만의 우승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전년도 7위로 사실상 꼴찌나 다름없었던 성적과 항명파동으로 산산조각났던 팀워크를 추슬러 우승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는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다. 1994년 9월 4일, OB가 쌍방울과 군산 원정 경기에서 패한 후 숙소에서 미팅 중 윤동균 감독이 “말을 듣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서울로 올라가 버리라”고 말하자 김상호·박철순·강영수·장호연·김상진 등 17명이 집단 이탈했다. 세칭 ‘1994년 OB 베어스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은 결국 윤동균 감독이 자진 사퇴하고 후임감독으로 ‘덕장’ 김인식감독이 새 지휘봉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김인식 감.. 2011. 7. 12.
허망했던 1994 시즌 [프로야구30년 타이거즈30년] 마운드 붕괴·수비 불안 … 초단기전 징크스 못깨 아종범의 대기록 탄생 … 타율(0.393)과 최다안타(196), 도루(84) 1994시즌 뚜껑을 열기전 해태 타이거즈는 당연한 우승팀으로 꼽혔다. 해태 우승에 대한 확신은 전년도 입단한 만능플레이어 이종범, 한대화·신동수를 내주고 LG에서 영입한 김상훈·이병훈 그리고 박철우·윤재호를 내주고 쌍방울에서 영입한 송인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해태와 LG의 트레이드는 양팀의 이미지 스타로 활약하던 두 선수 간의 트레이드로 화재를 모았다. ‘해결사’ 한대화를 내줄 만큼 기대가 컸던 ‘미스터 LG’ 김상훈은 정교한 3할타자인데다 해태에서 귀한 좌타자라는 이유로 각광을 받았다. ‘개그맨’ 이병훈은 한 시즌 최다 16개의 홈런을 쳤던 거포능력을 보유해 해태의.. 2011. 7. 7.
이광환의 자율야구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감독·선수간 격없는 소통 ‘신바람 야구’ 이상훈 - 서용빈 등 신구 조화 V2 달성 1994시즌의 화두는 ‘이광환의 자율야구’였다. LG 트윈스 이광환감독은 자율야구를 표방하며 상명하복식의 의사전달이 일반화되어있던 프로야구 시스템에 일대 혁명적인 사고로의 변화를 추구하고 나섰다. 결과는 LG 트윈스의 V2였다. 이는 LG가 첫 우승을 차지했던 1990시즌 당시 백인천감독의 ‘혼의 야구’와는 상반된 리더십에 따른 우승이었기에 세간의 관심도 그만큼 높았다. LG 트윈스는 ‘자율야구’의 근간이 된 감독과 선수들, 고참과 신참들 간의 격이 없는 소통을 통해 신뢰와 책임의식을 고양시켰다. 마운드에서는 베테랑 이상훈(18승)·김태원(16승)·정삼흠(15승)·김용수(30세이브) 등과 신인 인현배(10승)가 신구조화를.. 2011. 7. 5.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이종범의 등장 김성한 등 베테랑 부진 속 세대교체 선봉 수비·주루 플레이 등 종횡무진 V7 주역 전인미답의 V7을 달성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1993시즌은 세대교체가 진행되던 변혁기였다. 마운드에서는 프로야구 신기록이 된 10승이상-6명의 주역인 다승왕 조계현(17)과 송유석(11)·선동열(10)·김정수(10)·이강철(10)·이대진(10) 등이 투고타저의 선봉장이 되었으나 타격의 침체는 팬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봉연·김준환·김무종·김일권·김종모·김윤환·김일환·김종윤·김우근·김경훈·김평호 등 김씨 왕가의 왕자들은 몇 해 전부터 별자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유일하게 김성한만 독야청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성한도 세월의 흐름을 거슬리지 못하고 타율 0.273, 52타점, 6홈런으로 빛을 잃어가기.. 2011. 7. 2.
이종범 입단과 V7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바람의 아들’ 눈부신 활약 페넌트레이스·KS ‘평정’ 1993시즌 해태 타이거즈는 투-타, 신-구의 명암이 극명하게 부각된 가운데서도 파죽지세로 페넌트레이스와 포스트시즌을 평정하고 V7의 대위업을 이루었다. 해태는 4월 23일 8승4패로 단독 선두로 나선 이후 단 한 번도 선두 자리를 뺏기지 않은 채 81승3무42패(0.655)의 성적을 거두며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했다. 해태는 ‘국보’ 선동열이 부활하여 스토퍼로서의 새로운 보직을 완벽하게 수행한데다, 10승대 투수 6명을 앞세운 마운드의 힘으로 지키는 야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해태는 간판 타자들의 노쇠화로 팀타율 4위(0.251)의 부진 속에서도 이종범이라는 슈퍼스타의 입단으로 투타의 불균형을 극복할 수 있었다. 1993시즌의 준플레이오프는 서울.. 2011. 6. 27.
‘단기전의 명수’ 해태, ‘복병’ 염종석에 무릎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1992 플레이오프 1992시즌의 ‘단기전의 명수’ 해태 타이거즈는 초단기전에서는 ‘머리 잘린 삼손’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전통을 이어가며 블랙홀에 빠졌다. ‘밀림의 왕자’ 해태가 폭 5m 정도의 해저드에서는 기를 못 펴는 징크스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이다. 여기서 밀림은 한국시리즈이고 해저드는 플레이오프전, 5m의 폭은 5차전을 의미한다. 1990년 플레이오프전서 삼성 라이온즈에게 3전 전패를 당한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92년에도 플레이오프전에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또다시 패하고 말았다. 한국시리즈에 6회 진출해 단 한 차례의 실패도 없이 패권을 차지한 해태였기에 충격도 컸고 그 이유에 대한 해석도 분분했다. 상승세의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전은 시작 전부터 그러한 징크스가 언론에 회자되면서 해.. 2011. 6. 25.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