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이강철·조계현·이광우 특급 투수 입단에 ‘들썩’

by 2021S 2011. 6. 3.
<18> 89년 광주의 봄


해태 타이거즈는 국가대표 거포 출신 ‘코끼리’ 김응용 감독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에 힘입어 80년대의 최강 팀으로 군림하였다.

해태가 4연패 포함 V5를 달성하는 동안의 KS성적은 20승1무4패의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이 과정에서 ‘타이거즈식’ 우승방정식이 세워졌는데, 해태는 페넌트레이스 순위에 관계없이 한국시리즈만 진출하면 우승을 차지한다는 3차원적인 공식이 세워진 것이다.

경기력만을 가지고 분석하는 평면적인 사고력 가지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타이거즈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었다.

사회적으로는 격동적인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전개되는 시기에 민주화의 메카인 광주에서는 5월에는 야구경기를 볼 수 없는 아이러니를 뒤로 한 채 1980년대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80년대의 종착점인 1989년 광주의 봄은 걸출한 세 명의 국가대표 출신 투수들의 입단으로 들떠있었다.

고교때부터 초고교급 투수로 각광을 받았던 광주일고-동국대 출신의 이강철, 군산상고-연세대 출신의 조계현 그리고 군산상고-원광대 출신의 이광우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훗날 ‘한국형 잠수함’ 이강철은 언더핸드투수의 대명사로, ‘싸움닭’ 조계현은 경기운영능력의 일인자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투수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국가대표 에이스로 활약했던 이광우는 ‘여린 마음’이 프로에서는 걸림돌로 작용해 명성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광우는 해태에서 세 시즌동안 8승12패3세이브의 성적을 남기고 OB로 이적하고 말았다. 입단과정에서 해태 프런트는 이광우와 동기동창인 정명원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는데, 결국은 ‘미완의 대기’ 정명원 대신 ‘현재의 에이스’ 이광우를 선택했던 것이다.

190Cm의 장신에서 내리꽂는 직구의 위력이 대단했던 정명원은 해태와의 연습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할 정도의 좋은 투구내용을 보여줬었다. 하지만 연고 우선에서 세 명밖에 지명할 수 없는 제도 때문에 정명원을 태평양 돌핀스에 빼앗기고 말았다.

1989시즌 중 해태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소식이 전해졌다. ‘짝수 팀을 만들기 위해 제8구단 창단’이라는 명분으로 전북 연고의 쌍방울 레이더스를 창단한다는 발표가 그것이었다. 당시 고교야구팀이 단 2팀 밖에 없고 인구수도 태부족인 전북을 경남(한일그룹이 신청했다 강제로 포기했다는 설) 대신 선정했다는 것을 놓고 해태의 우승을 저지하겠다는 정치적인 음모가 있다는 설이 파다했다. 쌍방울이 해태 수석코치인 김인식을 감독으로 선임하여 음모론을 뒷받침했다.

/김재요 조선이공대 교수.한국야구기록연구회장


http://www.kwangju.co.kr/read.php3?aid=1307026800435606011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