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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57

1992시즌 롯데 V2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하극상의 쿠데타’ 근성야구로 8년만에 V2 1992시즌은 부산 갈매기가 8년 만에 다시 해운대로 날아든 한 해였다. 롯데 자이언츠는 1984년 38세의 나이로 첫 우승을 이끈바 있었던 강병철 감독을 재영입해 대대적인 팀 체질을 개선했다. 그 효과는 수확기인 가을에 나타났다. 팀 재편은 근성있는 영맨들을 최전선에 포진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신인급인 박정태·전준호·박계원·공필성 등을 중용한 것이 주효했다. 여기에 에이스 윤학길 외에 걸출한 신인 염종석이 가세한데다 김민호·김응국·이종운·박정태·전준호 등 5명의 3할대 타자들이 취약한 마운드를 보강하고도 남을 대활약을 펼쳤다. 또한 민제영사장 중심의 프런트가 초현대식 웨이트 트레이닝장과 클럽하우스를 개설해 선수단의 사기를 높여 준 공로도 간과할 수 없다. 페.. 2011. 6. 22.
덩치만큼 넉넉한 성격의 야전사령관 ,포수 장채근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V6 ‘일등공신’ 1991시즌 해태 타이거즈의 V6는 음지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 한 숨은 보석이자 주포인 장채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프로야구 팀이 우승을 하기 위해 가장 비중이 높은 역량 중 한 부분이 유능한 포수다. 집안의 어머니로서 역할과 유일하게 모든 야수를 바라보며 진두지휘하는 야전사분관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포수론’은 야구 관계자라면 누구라도 수긍하는 부분이다. 해태 타이거즈가 어려운 살림살이 중에서도 10시즌 동안 V6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도 개성 강한 자식들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인 주포 김무종과 장채근이 홈을 굳건히 잘 지켜준 덕분이다. 언제나 다감하게 다가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며 가까이 지낸 장채근은 덩치만큼이나 넉넉한 성격으로 모두를 편안하게 해주는 .. 2011. 6. 15.
<21> 역전으로 일군 V6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한대화·이순철·장채근 너도나도 ‘해결사’ 홈런뒤 호수비 … 엎치락 뒤치락 4연속 역전 프로야구 출범 10주년이 되는 1991시즌은 ‘신중론자’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감독의 ‘호언장담’으로 막이 올랐고, 선수단에 자신감을 심어준 고도의 ‘화술지략’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해가 되었다. 또한 해태 타이거즈의 텃밭이었던 전북(전주)을 기반으로 한 쌍방울 레이더스가 2군 리그에서 1년 동안 수련한 후 정규리그에 참여한 원년이기도 해서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높은 해였다. 1991년 해태는 전년도 플레이오프전서 삼성 라이온즈에 충격의 3전 전패로 패퇴한 후 절치부심의 스프링캠프를 보냈고, 챔피언 벨트를 넘겨준 한 해만에 ‘통합챔피언’으로 화려하게 컴백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해태 타이거즈가 기록한 페넌트레이.. 2011. 6. 13.
무등산폭격기 선동열도 속수무책 <20>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1990년 플레이오프 - 소수정예 한계 … 해태 V5 꿈 실패 1990시즌의 해태 타이거즈는 4연패-V5팀의 포효를 제대로 내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진 한 해였다. 이는 ‘백년지대계’의 준비가 부족했던 해태 프런트의 지원 문제이기도 했지만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선수들의 정신 상태의 문제이기도 했다. 타 팀은 매년 신인을 많게는 10명 정도로 보강해 전력의 누수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했으나 해태는 매년 3∼4명의 신인만을 뽑았다. 예상치 못한 주전 부상의 경우 전력차질이 예상되는 데도 구단은 ‘재정난’을 이유로 소수 정예방침을 고수했다. 무대책의 하책일 수밖에 없었다. 주전급 선수들 사이에는 ‘나 아니면 안돼’라는 안일함이 팽배했는데, 이는 애당초 플래툰시스템을 적용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 2011. 6. 9.
‘청룡’서 ‘쌍둥이’ 변신 … 기적의 불꽃 레이스로 우승까지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LG 트윈스 전성시대 언론의 프로야구 참여로 논란이 많았던 원년 멤버 MBC 청룡이 1990시즌에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해체됐다. MBC 청룡을 승계한 LG 트윈스는 백인천 감독을 영입해 ‘혼의 야구’로 프로야구 판을 뒤흔들어 놓으며 300만 관중시대의 서막을 여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시즌 전 ‘다크호스’ 정도로만 예상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지만 LG 트윈스의 우승 가능성을 예견한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그 근거로는 전통적으로 MBC 청룡 선수들은 개인적으로는 빼어난 기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팀워크의 부조화로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이는 해태의 선후배간의 엄격한 위계질서와는 상반되게 그 팀에서는 ‘스타가 곧 선배’라는 이야기가 선수들 사이에.. 2011. 6. 6.
[프로야구 30년 타이거즈 30년] 이강철·조계현·이광우 특급 투수 입단에 ‘들썩’ 89년 광주의 봄 해태 타이거즈는 국가대표 거포 출신 ‘코끼리’ 김응용 감독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에 힘입어 80년대의 최강 팀으로 군림하였다. 해태가 4연패 포함 V5를 달성하는 동안의 KS성적은 20승1무4패의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이 과정에서 ‘타이거즈식’ 우승방정식이 세워졌는데, 해태는 페넌트레이스 순위에 관계없이 한국시리즈만 진출하면 우승을 차지한다는 3차원적인 공식이 세워진 것이다. 경기력만을 가지고 분석하는 평면적인 사고력 가지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타이거즈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었다. 사회적으로는 격동적인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전개되는 시기에 민주화의 메카인 광주에서는 5월에는 야구경기를 볼 수 없는 아이러니를 뒤로 한 채 1980년대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80년대.. 2011. 6. 3.
[프로야구30년 타이거즈30년] <17> 1989년 해태 V5 한국프로야구 8년차를 맞이한 1989년에는 전·후기로 분리 운영돼 오던 페넌트레이스가 단일 시즌제로 전환되었다. 경기수가 120경기로 늘어 난 해이기도 하다. 첫 시험대에 오른 단일 시즌제는 페넌트레이스 3-4위팀이 3전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전, 2-3위팀이 5전3선승제의 플레이오프전을 거쳐 1위팀이 플레이오프전 승자와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방식이었다. 페넌트레이스 3위 태평양 돌핀스와 4위 삼성 라이온즈 간의 대결로 펼쳐진 준플레이오프전에서는 태평양이 2승 1패를 거두며 플레이오프전에 진출했다. 페넌트레이스 2위 해태 타이거즈와 태평양 돌핀스 간에 펼쳐진 플레이오프 1차전은 해태가 신동수와 선동열이 4이닝씩을 책임진 무자책 계투와 이순철·김성한·한대화의 3안타와 김종모의 3타점의 수훈으로 .. 2011. 5. 30.
[프로야구30년 타이거즈30년] ‘5월무적’ 해태 12연승 … 김대현 교통사고 사망 ‘충격’ 88시즌의 명암 1988시즌 프로야구는 서울올림픽과 상생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며 막을 내렸다. 해태 타이거즈는 4월17일 안방인 광주에서 에이스 선동열을 내세우고도 빙그레 이동석의 ‘아리랑’ 볼에 농락당하며 무4사구 노히트 노런의 수모를 당한 이후 극심한 타격 침체에 빠졌다. 5월부터는 ‘해결사’ 한대화를 중심타선에 배치하면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해서 12연승(1무포함)으로 분위기를 급반전시키는데 성공했다. 5월의 타이거즈가 강하다는 전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후기에는 ‘노지심’ 장채근이 김무종의 부상으로 주전 자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육중한 몸무게만큼 거포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7월 한 달에만 9개의 홈런을 쏘아 올리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8월6일 OB전서 홈런 한 개를 추가한 장.. 2011. 5. 27.
[프로야구30년 타이거즈30년] ‘꽃돼지’의 볼끝은 살아서 꿈틀꿈틀 거렸다 고졸신화 문희수와 V4 1988년은 역사적인 하계올림픽이 대한민국에서 개최되던 해로 올림픽이 프로야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초미의 관심이 쏠렸다. 또한 태평양 돌핀스가 ‘꼴찌의 대명사’ 삼미 슈퍼스타즈에 이은 청보 핀토스를 계승해서 리그에 참여한 해이기도 했다. 한국프로야구 7년차를 맞이한 1988시즌의 해태 타이거즈는 포스트 시즌 진출방식의 수혜를 입어 단기전에서 행운의 승리로 패권을 차지했다는 일각의 따가운 눈총을 불식시키며 명실상부하게 챔피언이 되었다. 해태는 전·후기 똑같이 34승1무19패의 성적을 거두며 1위를 독점했다. 또한 방어율(2.86), 탈삼진(501), 타율(0.283), 홈런(112) 및 도루(136) 등 투·타에 걸친 대부분의 팀 성적 부문에서 압도적인 차로 1위를 차지했다.. 2011. 5. 24.
[프로야구30년 타이거즈30년]<14> 타이거즈 정신 1987년 해태 타이거즈는 시즌 내내 전년도 우승 후유증을 심하게 앓아야만 했다. 핵심 전력인 선동열은 개막 이틀 전에야 연봉협상이 타결되는 등 전반적으로 스프링 캠프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불안한 상태로 시즌을 맞이해야만 했다. 호사다마라고 전년도 한국 시리즈의 영웅이었던 김정수는 왼손혈행장애, 김성한은 최동원의 투구에 맞아 손목 부상, 김종모는 의사장티푸스 그리고 문희수·강상진·장채근 등의 입원으로 팀 주축 선수들이 장기간 전력에서 이탈하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또한 신진대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으로 베테랑 김용남과 강만식이 빙그레 이글스로 트레이드되는 아픔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인 수혜를 입어 아슬아슬하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었다. 전주에서 .. 2011. 5. 19.
[프로야구30년 타이거즈30년]<13> 1987 해태 V3 ‘포스트시즌 진출=우승’ 단기전의 명수 한국프로야구 6년차를 맞이한 1987시즌 포스트 시즌 진출방식은 불합리성이 회자되었지만 전년도 방식 그대로 이어졌다. 전·후기 중 한 번만 2위 안에 들면 플레이오프를 거치는 이 방식은 선수층이 두텁지 못하고 단기전 승부에 능한 해태 타이거즈로서는 환영할만한 제도였다. 해태는 전기에서는 3위에 머물렀지만, 후기에서는 간신히 2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냈다. 해태는 전기 2위인 OB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전에서 1승2패(11-3, 3-10, 1-4)의 열세에서 치러진 4차전서 9회말 김성한의 역주로 끌고 간 연장 10회말에 최일언의 폭투로 극적인 역전승(4-3)을 거두었다. 최종전인 5차전서는 4-0으로 셧아웃시키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전서는 김대.. 2011. 5. 17.
[프로야구30년 타이거즈30년]<12> 해결사 한대화 해태 타이거즈의 1986시즌은 한대화의 트레이드 거부 파동으로 문을 열었다. 1982년 서울서 개최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숙적 일본과의 결승전 극적인 3점홈런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대전고-동국대 출신의 국가대표 한대화가 1983년 OB 베어스에 입단했다.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입단했던 한대화는 김성근 감독의 훈련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주전 자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비주류로 홀대받으며 세 시즌동안 0.256(8홈런)이란 초라한 성적을 냈다. 해태는 양승호-황기선을 OB에 내주고 한대화를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며 내야수비와 중심타선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한대화가 신생팀이자 고향팀인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하기를 희망하며 해태로의 이적을 거부하는 소동이 발생했다. 우여곡절 끝에 두 달여 만에 이적에 동.. 2011.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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